펩타이드란?
아미노산이 수십 개 이내로 짧게 이어진 물질입니다. 우리 몸의 호르몬과 신호물질 상당수가 펩타이드이고, 인슐린이나 GLP-1 비만치료제도 넓게 보면 펩타이드 의약품입니다. 이 글에서 다루는 것은 그중 정식 허가 없이 회복·노화·미용 목적으로 유통되는 펩타이드들입니다.
3줄로 미리 보는 인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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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운동을 마친 30대 직장인이 냉장고에서 주사제가 담긴 유리병, 바이알을 꺼냅니다. 그리고 얇은 주사기로 약을 덜어 배나 허벅지에 직접 놓습니다. 얼굴에 맞는 스킨부스터와 달리, 피부 아래 지방층에 스스로 놓는 피하주사입니다. 그가 맞는 것은 스테로이드도, 비만치료제도 아닌 펩타이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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펩타이드란?
아미노산이 수십 개 이내로 짧게 이어진 물질입니다. 우리 몸의 호르몬과 신호물질 상당수가 펩타이드이고, 인슐린이나 GLP-1 비만치료제도 넓게 보면 펩타이드 의약품입니다. 이 글에서 다루는 것은 그중 정식 허가 없이 회복·노화·미용 목적으로 유통되는 펩타이드들입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와 피트니스 커뮤니티에서는 이런 장면이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부상 회복이 빨라진다", "피부가 좋아진다"는 입소문을 타고 사용자가 늘고 있죠. 미국의 한 설문에서는 응답자의 5%가 지난 3년간 가구 구성원 중 누군가 조제 펩타이드를 써본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업계에서는 이 시장을 10억~30억 달러 규모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회복이나 노화 방지를 내세우는 이 주사들 대부분은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설문 출처
그렇다면 근거가 부족한 이 주사가 어떻게 이만큼 큰 시장이 됐을까요? 가장 유명한 펩타이드 중 하나인 BPC-157의 일대기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BPC-157은 1990년대 초 크로아티아 연구진이 위액 속 단백질의 일부를 본떠 만든, 아미노산 15개로 이뤄진 펩타이드입니다. 동물실험에서는 위장, 힘줄, 근육의 회복을 돕는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사람을 대상으로 안전성과 효과를 입증한 임상 근거는 지금도 매우 부족합니다.
이 물질을 먼저 알아본 것은 과학계가 아닌 보디빌더들이었습니다. 2010년대 보디빌딩 포럼에서 '부상 회복 펩타이드'로 입소문이 나자, 합성업체들이 '연구용(RUO, Research Use Only)' 라벨을 붙여 온라인으로 팔기 시작했했죠. 라벨에는 "사람에게 쓰지 마세요"라고 적혀 있지만,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진짜 용도는 연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온라인에서 연구용으로 팔리던 펩타이드는 의사의 처방과 약사의 조제를 거치는 경로로도 유통됐습니다.미국에는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사가 환자에게 필요한 성분과 용량으로 약을 만드는 조제약국 제도가 있습니다. 일부 미승인 원료도 FDA가 정한 요건을 충족하면, 평가가 진행되는 동안 조제 및 판매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BPC-157도 2018년경 업계의 신청으로 이 목록에 올랐지만, 원료의 정확한 형태도, 불순물 시험 결과도, 사람에게 써 온 이력도 부족했습니다. 결국 FDA는 2023년 9월 BPC-157을 포함한 19개 펩타이드를 안전성 우려로 조제에 쓸 수 없는 '카테고리 2'로 분류했습니다.
그래도 시장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수요는 연구용 시장으로 옮겨 갔고, 미국에서 중국산 호르몬·펩타이드 수입액이 1년 만에 약 두 배로 늘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표기된 성분이 아예 검출되지 않는 제품까지 있는 상황이었죠.
회생의 순간은 2026년에 찾아왔습니다. 처음 신청했던 업체들이 신청을 철회하면서, FDA는 4월 BPC-157을 포함한 12개 펩타이드를 ‘카테고리 2’에서 제외했습니다. 건강 자율권을 강조해 온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RFK Jr.)가 공개적으로 펩타이드를 언급한 지 두 달 뒤였습니다. 다만 이 제외는 신청 철회에 따른 행정적 변경으로, 안전성을 인정하거나 사용을 승인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FDA 자료
7월에는 FDA 자문위원회가 BPC-157을 조제 허용 원료 목록에 올리는 데 찬성 8표, 반대 6표로 권고했습니다. 이어 10월 28일에는 미국 보건복지부가 일부 펩타이드의 조제에 대해 일정 요건 아래 단속을 유예하는 정책 초안을 공개했습니다. 정식 의약품 승인과는 별개지만, 펩타이드는 회색지대에서 양성화 쪽으로 한 발을 내디뎠습니다. 자문위 표결 보도, 정책 초안 공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 근거가 이렇게 약한데, 어떻게 BPC-157과 펩타이드는 보디빌더의 비밀에서 대중의 화제로 부상했을까요? 결정적인 계기는 GLP-1 비만치료제입니다. 물론 GLP-1은 안전성과 효과를 검증받은 전문의약품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물질의 효능이 아니라, 주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인식입니다.
주사제가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넘어야하는 높은 벽은 효능이 아니라 공포였습니다. ‘내 몸에 내가 바늘을 찌른다’는 심리적 장벽은 어떤 스타트업도 혼자 허물 수 없는 거대한 과제죠. 그런데 GLP-1이 이 일을 대신 해 주었습니다. 수백만 명이 매주 스스로 배에 주사를 놓기 시작하면서 셀프주사는 그다지 괴상하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두 제약회사의 광고비와 의사들의 처방이 만든 익숙함을 펩타이드가 그대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유통망도 물려받았습니다. 2022년부터 GLP-1이 품귀를 빚자 미국의 조제약국과 텔레헬스 기업들은 정품보다 싼 조제 GLP-1을 대량으로 공급했습니다. 2024~2025년 품귀가 해소되며 조제약국이 생산할 수 있는 근거도 사라졌지만, 환자를 모으고 처방하고 집까지 배송하는 유통망은 남았습니다. 미국의 대표 텔레헬스 기업 Hims & Hers가 GLP-1 품귀 해소가 발표된 바로 그날 펩타이드 생산시설 인수를 발표한 것은 상징적입니다. Hims & Hers 발표, FDA 품귀 해소 발표
그렇다면 그사이 과학은 얼마나 나아갔을까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제대로 된 임상 근거는 지금도 손에 꼽을 만큼 적습니다.
이처럼, 펩타이드 시장의 성장을 이끈 건 과학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물질이, 인식이 바뀌고 유통망이 생기면서 비로소 팔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펩타이드는 의료와 과학의 영역이라기보다 소비재의 영역에서 움직인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주사를 맞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한 펩타이드 서비스가 사용자 1,000여 명에게 물은 결과를 보면, 25~34세와 테크 업계 종사자의 비중이 두드러졌습니다. 응답자 상당수는 여러 펩타이드를 조합해 썼고, 3개 이상을 함께 쓰는 사람일수록 효과를 더 높게 평가했습니다. 서비스 운영사가 진행한 설문이라 전체 사용자를 대표하거나 실제 효능을 입증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소비자의 기대와 사용 방식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들도 펩타이드는 치료제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수면을 측정하는 스마트링을 끼고, 혈액검사 수치를 관리하듯, 회복용 펩타이드 조합을 짜는 일은 '내 몸을 최적화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우리 모두 ‘영양제를 먹는 나’를 상상하며 영양제를 쇼핑하곤합니다. 정작 영양제를 먹어도 딱히 활력이 돈다는 생각은 들지 않죠. 영양제는 효과의 근거보다 관리하는 행위 자체에서 만족을 얻습니다.
근거가 약해도 팔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비자가 사는 것은 BPC-157이라는 물질이 아니라, 그 물질을 둘러싼 루틴과 정체성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수요가 이렇게 크다면, 누군가 제대로 임상을 해서 정식 의약품으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BPC-157 같은 펩타이드는 특허가 없거나 이미 만료됐고, 합성 기술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한 회사가 수백억 원을 들여 안전성과 효과를 입증하면, 그 근거의 혜택은 경쟁사도 함께 누립니다. 시장 규모가 가장 큰 미국에서조차 아무도 먼저 비용을 내려 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한 업계 분석에 따르면 승인과 인허가를 거쳐 양성화가 된다면 "물질은 범용재가 되고, 시장은 가격과 마진을 깎는 경쟁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근거는 모두에게 필요하지만, 누구의 자산도 되지 않는 공공재가 되어버리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 흐름은 한국에도 들어올까요? 단기적으로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미국에 없는 벽이 세 겹 더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허가 구조입니다. 미국은 일단 유통된 뒤 문제를 관리하는 사후관리의 틈이 넓은 반면, 한국은 허가받은 것만 쓸 수 있는 사전허가 원칙이 강합니다. 히알루론산이나 PDRN 스킨부스터는 의료기기로 허가받아 빠르게 시장을 만들었지만, 주사용 펩타이드는 세포신호를 통해 효능을 내기 때문에 의약품으로 분류됩니다. 따라서 국내에는 임상 근거 없이는 들어올 길이 없고, 앞서 본 것처럼 그 비용을 낼 주체가 없습니다.
둘째는 병원 중심의 구조입니다. 미국에서는 검사 회사, 텔레헬스, 조제약국이 각자 사업으로 성장하며 펩타이드 유통망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은 검사, 처방, 수액이 한 의원 안에서 원스톱으로 이뤄집니다. 효율적이지만, 그 사이에서 별도의 사업이 자랄 틈은 좁습니다. 미용 의료와 달리 기능의학 분야에서는 의원을 묶어 운영하는 경영지원회사(MSO)도 아직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셋째는 실손보험입니다. 한국의 웰니스 주사 시장은 실손보험의 보장 여부에 따라 움직여 왔습니다. 1~2세대 실손은 비급여 주사를 폭넓게 보장했지만, 2017년 출시된 3세대부터는 별도 특약이 있어야 하고, 2026년 출시된 5세대에서는 비중증 비급여의 자기부담률이 50%로 높아졌습니다. 이른바 마늘주사도 비타민 B1 결핍처럼 허가된 적응증에 해당하는 진단이 있어야 보험금이 나옵니다. 그렇기에 허가된 적응증이 없는 펩타이드는 실손 보험을 적용받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합니다. 금융위원회 설명
그렇다면 펩타이드 붐은 한국과 무관한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수요는 근거를 앞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간극을 메우려는 정공법에 큰돈이 모이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GLP-1의 수명연장 효과입니다. GLP-1는 수천 명 규모의 임상을 거듭하며 근거를 쌓았고, 그 근거가 이제 체중 감량 너머로 넓어지고 있습니다.
가장 확실한 성과는 심혈관 분야입니다. 심혈관 질환이 있는 과체중·비만 성인 1만 7천여 명이 참여한 SELECT 임상에서 세마글루타이드는 위약 대비 주요 심혈관 사건의 상대위험을 20% 줄였습니다. 주요 심혈관 사건이란 심혈관질환으로 인한 사망, 심근경색, 뇌졸중을 뜻합니다. FDA는 이 결과를 바탕으로 2024년 위고비에 해당 환자군의 심혈관 위험 감소 적응증을 추가했습니다. FDA 발표
노화 자체를 겨냥한 연구도 시작됐습니다. 2026년 UC샌디에이고 연구진은 HIV 감염과 관련된 지방 축적이 있는 성인을 대상으로 한 무작위 임상에서 세마글루타이드가 일부 후성유전학적 노화 지표를 개선했다고 보고했습니다. DNA의 화학적 변화를 분석해 생물학적 나이를 추정하는 지표입니다. 다만 이 지표의 개선이 곧 사람의 실제 수명 연장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년기 쥐의 수명을 늘렸다는 동물 연구도 나왔지만, 사람에게 같은 효과가 있는지는 추가 검증이 필요합니다. UC 연구진 설명
가격의 벽도 낮아지고 있습니다. 2026년 3월 인도에서 세마글루타이드 특허가 만료되자 제네릭이 쏟아졌고, 캐나다에서도 5월 제네릭이 출시됐습니다. 또한 한국에서도 한미약품의 '에페(에페글레나타이드)'가 10월 식약처 허가를 받아 국산 첫 GLP-1 비만치료제로 출시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노보 노디스크는 위고비의 건강보험 급여 등재를 신청했죠. 지금은 비만 치료 목적의 GLP-1이 모두 비급여지만, 급여 논의가 시작됐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근거를 쌓은 펩타이드는 소비재를 넘어 공공 의료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두 번째 정공법은 아예 새로운 물질의 발견입니다. 반려견 수명 연장약을 개발하는 Loyal은 FDA로부터 효과의 합리적 기대와 안전성 자료를 차례로 인정받았습니다. 이제 제조 심사만 넘으면 수명 연장을 목표로 한 약으로는 처음으로 조건부 허가를 받게 됩니다.
샘 올트먼이 초기 자금을 댄 Retro Biosciences는 2025년 말 첫 후보물질의 임상에 들어갔고, 2026년에는 18억 달러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닙니다. 노화 관련 펩타이드 MOTS-c에서 출발한 CohBar는 임상 1상을 마쳤지만, 주사 부위의 이상 반응을 줄일 제형을 끝내 찾지 못했고 2023년 회사 청산에 들어갔습니다.
펩타이드 회색시장과 롱제비티 신약은 같은 수요의 양 끝에 있습니다. 한쪽은 근거 없이 빨리 팔고, 다른 한쪽은 시간과 돈을 들여 근거를 만듭니다. 한국에서 의미 있는 기회는 그 사이에서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근거를 만드는 데 정면으로 도전하는 회사, 또는 근거가 쌓이는 동안 소비자의 인식과 루틴을 설계하는 회사. 펩타이드 붐이 남긴 진짜 질문은 "어떤 물질이 뜰까"가 아니라, "누가 이 수요에 근거와 신뢰를 붙일 것인가"가 아닐까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은 롱제비티라는 시장을 점점 더 키우고 있습니다. 펩타이드는 그 수요가 드러난 한 장면이죠. 이어지는 2부와 3부에서는 이 시장의 다양한 시도와, 그 안에서 자라나는 새로운 사업 기회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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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연 선임 심사역 (Jade) | Digital Healthcare
기술의 혁신과 효과적인 접근을 통해 사람들이 더 건강해지고, 일상이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료현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업가와 함께 고민하고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동반자가 되고자 합니다.
Editor Son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