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연 선임 심사역 (Jade) | Digital Healthcare
기술의 혁신과 효과적인 접근을 통해 사람들이 더 건강해지고, 일상이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료현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업가와 함께 고민하고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동반자가 되고자 합니다.
병원에 가면 왜 이렇게 해야 할 검사가 많은 걸까요? 피 뽑고, 소변 가져가고, 조직 떼어내고… 몸을 맡기다 보면 내 세포 하나하나가 다 파헤쳐지는 기분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했던 ‘피 검사’가 요즘은 완전히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액체생검(Liquid Biopsy)입니다.
“부르는 이름만 달라진 거 아니에요?” 이렇게 물으실 수 있지만, 바로 답변을 드리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액체생검이란 피뿐만 아니라 침, 소변, 심지어는 뇌척수액까지 아우르는 우리 몸의 모든 액체를 들여다보는 기술입니다. 생검(biopsy)은 질병을 진단하거나 치료 경과를 확인하기 위해 소량의 인체 조직이나 세포를 채취하여 검사하는, 말 그대로 생체검사를 뜻하는 말인데요. 액체생검은 앞서 말씀드린 몸 안의 모든 액체 속에 숨어 있는 DNA, RNA, 나아 세포 조각까지 읽어내는 기술이기 때문에 ‘생검’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예전에는 단백질 수준에서 ‘이 단백질이 많네’, ‘저 단백질은 적네’를 보는 시대였다면, 이제는 분자의 언어를 해독하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한편, 액체생검이라는 단어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암 조기진단’을 떠올립니다. 아마 테라노스의 강력한 메시지, “몇 방울의 피로 모든 병을 진단한다”는 이야기의 여파라고 생각합니다.
조작으로 일단락된 테라노스 사건은 진단검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전설로 남았지만, “채혈 한 번으로 내 몸의 모든 변화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진단 스타트업과 연구실이 액체생검에 도전하는 이유죠.
그런데 사실 액체생검의 매력은 ‘조기진단’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 기술은 이미 진단받은 환자들의 치료 여정 속에서도 강력하게 빛을 발합니다. 이를 통해 암 치료 중 잔여 종양이 남아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고, 재발 징후를 수개월 전에 잡아내기도 하죠.
다시 말해, 액체생검은 단지 진단의 시작점이 아니라 치료의 나침반이 될 수 있는 기술입니다.
이제 상상해 봅시다. 건강한 사람, 치료 중인 사람, 완치 후 관리 중인 사람… 각자의 여정에서 액체생검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그 보이지 않는 피 한 방울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보겠습니다.
암 환자의 긴 여정은 크게 치료 후 재발 관리, 전이 발생 시의 표적 발굴, 그리고 항암 치료 중의 반응 모니터링으로 나뉩니다. 각 단계는 의료진의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필요로 하죠. 이 결정적인 순간마다 액체생검이 어떤 이정표를 제시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액체생검의 진가를 알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활용 영역은 치료 종료 후 감시입니다. 수술과 항암을 마치고 암 치료가 끝나는 순간, 환자에게는 새로운 여정이 시작됩니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 간격으로 병원을 찾아 피 검사와 영상 검사를 반복합니다. 그때마다 환자분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스쳐 지나갑니다.
“혹시 암이 다시 생긴 건 아닐까?”
이처럼, 한 번 아팠던 사람은 건강에 훨씬 더 예민해집니다. 다르게 말하면, 아픈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재발감시는 건강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건강검진보다 훨씬 실질적인 진단가치와 지불의향을 지닌다는 것이죠. 액체생검은 이 분야에서 진짜 위력을 발휘합니다.
지금까지는 재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암 수치’, 즉 종양표지자(tumor marker)를 활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난소암에서 CA-125가 상승하면 CT를 찍는 식이죠. 하지만 CT 영상에서 병변이 보일 정도라면, 이미 세포가 10⁵~10⁶개 이상 군집한 상태입니다. 이것을 거시적 재발(macro-relapse)이라고 합니다.
반면 액체생검은 현미경 수준의, 즉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적 재발(micro-relapse)을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남아 있는 암세포를 미세잔존질환(Minimal Residual Disease, MRD)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액체생검은 암세포의 ‘분자적 흔적’을 읽어 미세잔존질환을 평가하는 아주 섬세하고 정밀한 검사죠.
이 접근의 가능성을 실제 환자에게서 증명한 연구들이 있습니다. 먼저 SUCCESS-A trial은 3기 유방암 환자 1,087명을 대상으로 MRD를 모니터링한 연구입니다. 유방암 항암 종료 후 24개월 동안 액체생검을 통해 혈액 안의 순환종양세포(CTC, circulating tumor cell)를 관찰한 결과, CTC가 발견된 환자는 그렇지 않은 환자보다 질병 재발률이 높고 전체 생존율이 낮았습니다. 즉, 액체생검으로 CTC 등의 혈액 속 미세한 세포들을 미리 발견한다면, 이를 조기 신호 삼아 임상적 예후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죠.
대장암에서도 비슷한 연구가 있습니다. 항암치료 후 일정 간격으로 ctDNA를 연속추적한다면, 영상검사보다 최대 1년 앞서 재발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ctDNA의 존재 유무는 실제 치료 방향에도 중요한 정보가 됩니다. ctDNA의 존재 유무에 따라 치료를 조기에 시작할지에 대한 연구도 이어서 진행되고 있으며, 반대로 수술 후 미세잔존질환이 없을 경우 세트처럼 시행하던 화학 항암요법을 생략하는 논의도 진행 중입니다.
다만 이때 MRD로 감지되는 ctDNA는 혈중 cfDNA의 0.1% 이하일 정도로 소량이기 때문에, 극도로 민감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항암요법은 괴로운 과정이기 때문에 최대한 안할 수 있다면 좋겠지요. 이처럼 MRD의 존재 여부는 치료의 큰 방향성을 세우는 데 핵심적인 정보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액체생검은 단백질 외에도 DNA, RNA 및 온갖 대사물질을 대상으로 한다고 앞서 말씀드렸는데요. 여기서 액체생검의 두 번째 용도가 탄생합니다. 바로 유전자상 변이를 찾아내어 환자에게 무엇이 문제였는지, 이를 바로잡으려면 무엇을 공략해야 할지 파악하는 것입니다. 액체생검이 정밀의학과 항상 짝꿍처럼 붙는 이유가 이것이죠.
특히 액체생검은 전이 및 재발 사례에서 유전자의 변이를 알아낼 수 있다는 강력한 장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전이**·**재발은 기존 암세포가 한 단계 이상 변이하면서 시작됩니다. 또한 전이가 발생하면 여러 지점으로 흩어져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걸 일일이 모두 떼어 검사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병변에서는 유전자 A가 문제이고, 다른 병변에서는 유전자 B가 문제일 수 있죠.
하지만 액체생검은 혈액을 채취하고, 혈액에는 여러 병변에서 유래된 물질이 다 같이 흐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모든 병변을 잘라내지 않고도 전반적인 유전자 변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혈액으로 재발환자의 유전자 변이를 파악하고 이를 임상결과로 연결한 임상시험이 DETECT III 입니다. DETECT III 임상시험은 HER2- 원발성 유방암 환자 중에서 전이 및 재발이 발생한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다. 재발이 확인된 시점에서 액체생검을 한 결과, 첫 진단 시에는 관찰되지 않았던 HER2의 변이가 있는 암세포(circulating tumor cell, CTC)가 발견되었습니다.
이후 변이가 확인된 환자에게는 표준치료 외에 HER2 표적치료제인 라파티닙을 추가하였는데요. 결과는 의미 있었습니다. 생존 기간이 유의한 수준으로 연장되었던 것입니다. DETECT III 연구는 재발 환자에서 조직생검 없이도 항암제 선택과 같은 중요한 치료 전략을 실시간으로 변경할 수 있다는 결과를 보였습니다.
액체생검의 세 번째 활용 영역은 항암치료 중 치료반응을 모니터링하는 것입니다. 항암 치료 중에는 주기적으로 CT나 MRI를 찍어서 암의 크기가 커졌는지, 줄어들었는지를 확인합니다.
특히 액체생검은 면역항암제가 많이 쓰이는 영역에서 특히 유용합니다. 키트루다, 올라파립과 같은 면역항암제는 암의 면역 회피 기전을 바꾸어 우리 몸의 정상 면역체계가 암을 공격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다보니 암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염증반응이 일어나고, 이때는 일시적으로 암 주변이 부풀어 보입니다.
이를 의학적으로 ‘pseudo-progression’이라고 합니다. 영상으로 평가할 때는 면역작용 때문에 커진 건지, 아니면 암 자체가 진행되어 커진 건지 알 수 없죠. 물론 약의 효과는 기존 암 수치 검사와 환자의 증상을 기반하여 평가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액체생검을 활용한다면 암뿐만 아니라 증가한 면역세포의 프로파일도 획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좀 더 근거에 기반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겠죠.
액체생검의 역할을 암 환자의 치료 여정에 빗대어 정리하면 위 그림과 같습니다. 암의 진단부터 치료, 그리고 완치 판정에 이르기까지, 액체생검은 모든 단계에서 의료진이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정밀한 이정표를 제시합니다. 서론에서 언급했던 '조기 진단' 역시 이 긴 여정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요, 치료의 출발선을 앞당겨 전체적인 치료 성공률을 획기적으로 높이고자 하는 도전이었습니다.
이렇게 액체생검은 치료 여정의 여러 단계에서 의미 있는 정보를 제공하며 활약하고 있는데요. 이중 특히 널리 사용되고 있는 분야는 바로 혈액암입니다. 혈액암은 피 안의 다양한 혈구세포들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암이다보니 샘플 채취도 좀 더 유리합니다.
예를 들어 급성 골수성 백혈병에서는 MRD 평가를 진단 후 예후 예측, 치료 반응 평가, 치료 전략 결정에 필수적으로 포함하도록 명확히 권고하고 있습니다. 현 가이드라인은 MRD 음성 여부를 완전관해*의 중요한 지표로 분류하고, MRD 결과에 따라 이식 전후 치료 강도를 결정하거나, 면역치료, 추가 약제를 투여할지 등 중요한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특히 2024년 4월 FDA 종양학 자문위원회가 MRD 결과를 조기 종료점으로 만장일치 승인하면서, MRD 모니터링은 단순한 연구도구에서 필수 임상도구로 완전히 전환되었습니다.
*완전관해(Complete Remission, CR): 암 치료 후 영상 검사, 종양표지자 검사 등에서 암의 흔적, 즉 병변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상태를 말하며, 재발 없이 완전관해가 5년 이상 지속되면 완치로 판단합니다.
다만, 고체암은 아직 MRD를 이용한 진단이 진료 가이드라인에 포함되지는 않았는데요. 그럼에도 고형암에서 MRD를 이용하고자 하는 논의는 꾸준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쓰이는 제품 중 하나는 Natera의 MRD 모니터링 진단 제품인 ‘시그나테라(Signatera™)’입니다. 시그나테라는 혈액 내 종양 특이적 순환 종양 DNA(ctDNA)를 추적하여 MRD을 검출하도록 설계된 맞춤형 종양 정보 기반 액체생검으로, 대장암, 유방암 등에도 쓰이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Natera 외에도 Guardant, FoundationOne과 같은 회사에서도 MRD 모니터링을 위한 제품을 만들고 있으니 이 시장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액체생검이 MRD 발견부터 치료 반응 모니터링의 영역까지 적용되며, 치료의 수준을 얼마나 정밀하게 끌어올리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역이 스타트업에게 어떤 기회의 땅이 될 수 있을까요?
이제 시선을 ‘임상적 효용’에서 ‘시장 전략’으로 옮겨보겠습니다. 거대 기업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스타트업이 실제로 승부를 걸어볼 만한 전략적 요충지는 어디인지 분석해 보려고 합니다.
거대한 규모와 자본으로 뭉친 진단공룡들의 격전지인 액체생검 시장에, 스타트업이 ‘도전할 수 있는’ 액체생검 분야는 어디일까요? 앞서 다루었던 3개의 분야에 조기진단까지 포함한 액체생검의 4개 활용 분야를, 기술 난이도, 시장의 규모, 수익화 속도라는 3개 기준을 바탕으로 평가해 보았습니다. 기술 난이도는 얼마나 예민한 장비를 요구하는지, 수익화 속도는 가치를 입증하기 위한 임상시험의 난이도와 수익 구조를 반영하여 산정했습니다.
MRD 모니터링을 통한 재발예측은 액체생검 기술로 창업하는 회사들이 가치를 보다 속도감 있게 쌓을 수 있는 분야입니다. 극저농도의 물질을 탐지해야 한다는 난관은 여전하지만, 이미 암종을 알고 있다면 훨씬 현실적인 단계에서 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액체암에서 가치가 증명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고체 암종에서 MRD을 이용한 평가에 호의적인 점도 중요합니다.
표적·내성 진단에서의 플랫폼도 가능성 있는 분야입니다. 여기서는 환자 데이터를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관건이기도 한데요. 여전히 표적 치료제가 개발되고 있는 현재의 환경이라면 시장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조기진단은 ‘가장 로망이 있지만 스타트업이 하기엔 험난한’ 영역입니다. 인구 전체가 스크리닝의 대상이니 잠재적 시장은 가장 크지만, 기술적으로 민감도와 특이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면서도 비용 효용성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또한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MRD 스크리닝 및 치료평가와는 달리 다양한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대규모의 코호트를 형성하여 장기간 관찰해야하기 때문에 임상시험의 난이도도 상당합니다.
이제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사람들은 숫자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보에 대한 갈망 속에서 유전학 데이터와 전자소재·장비의 정밀함은 작지만 의미 있는 시그널을 찾는 등불이 되었죠.
앞으로는 이 등불을 어디에서 어떻게 활용하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어둠 속에서 나아갈 길을 밝히는 횃불로써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이미 아름답고 환한 조명으로 밝혀진 방에서 무의미한 불씨로 스러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스타트업도 실험실(Wet Lab)에서의 결과와 데이터의 조합을 통해 새로운 하이브리드 마커를 만들 수 있는 시대입니다. 물론 대규모의 자본과 임상시험을 필요로 하는 영역을 도전하기에는 여전히 벽이 높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하지만 알고 도전하는 것과, 모르고 도전하는 것은 다릅니다.
저는 분명 의료 사용량과 데이터가 많은 한국의 환경이라면, 액체생검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스타트업이 지속적으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열심히 실험하고 고뇌하는 창업가에게 이 글이 닿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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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연 선임 심사역 (Jade) | Digital Healthcare
기술의 혁신과 효과적인 접근을 통해 사람들이 더 건강해지고, 일상이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료현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업가와 함께 고민하고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동반자가 되고자 합니다.
카카오벤처스 투자팀의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커뮤니케이션팀 에디터 인턴 Chloe가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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